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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목사의 교회사이야기

교회 vs 교회

2018년 02월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걸크러쉬_메리여왕 #화형은너무해 #천로역정_넘사벽메가히트
#중세끝_근대시작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영웅들은 개혁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은 아직 가톨릭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중세 1천 년 동안 유럽의 종교였던 가톨릭은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유럽은 옛 교회인 가톨릭과 새로운 교회인 개신교의 갈등의 장이 됐다.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가 싸워야 했던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였다.


영국은 지금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에 의해 유럽 대륙인 독일과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이때, 도버 해협 건너편 영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유럽 대륙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가 부패한 가톨릭 때문이었다면,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왕실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헨리 세, 왕실 스캔들의 시작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가톨릭 신자요 교황의 지지자였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의 하녀 앤 불린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이혼을 강요했고,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결혼 서약을 무효화 해 달라고 요청한다. 교황이 이를 거절하자 헨리 8세는 결국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영국 국교회를 설립해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것이다.
1547년, 헨리 8세의 셋째 왕비가 낳은 에드워드 6세가 왕좌에 올랐다. 개신교 신자였던 에드워드 6세는 몸이 허약해 16세에 세상을 떠난다. 결국 영국 왕실의 보좌를 차지한 사람은 헨리 왕의 본처 캐서린이 낳은 유일한 딸, 메리 1세였다.


최초의 영국 여왕, 메리 1
메리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캐서린의 불행을 보며 자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계모인 앤 불린의 시녀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영국 최초의 여왕이 된 메리 1세는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을 영국의 국교로 정했다. 그녀는 가톨릭 국가였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왕과 사랑에 빠졌고,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가톨릭 교도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개신교 신도에게는 재앙과 같았다. 가톨릭 여왕이 개신교 신자를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의 메리(Bloody Mary)
개신교 지도자인 토머스 크랜머와 니콜라스 리들리를 포함해 300여 명의 무고한 개신교 신자가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했다. 공포에 빠진 국민은 메리 1세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개신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생명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수호자 메리 1세의 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여왕이 된 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세, 성공회를 만들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수용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의 예식과 개신교의 신앙을 합쳐 ‘성공회(The Anglican Church)’라는 이름의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만들고, 이를 영국의 국가 종교로 삼았다.


영국의 개혁자들, ‘청교도’
엘리자베스 1세의 중도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청교도(Puritans)’라고 불렸다. 이들은 성공회 안에 남아 있는 가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기 원했다. 청교도들은 철저한 성경적 신앙의 전통을 지키며 주옥 같은 기독교 고전을 써 나갔다. 이 당시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지금도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다.


청교도, 신앙고백을 남기다
엘리자베스 1세를 이은 제임스 1세는 가톨릭의 옹호자였다.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영국에 남은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믿음의 내용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157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1643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 5년 6개월 동안 하루 8시간씩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문서로 작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문서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위대한 고백서는 신대륙으로 넘어가 미국 교회의 기초가 됐고, 훗날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 땅으로 건너와 한국 장로교회의 기초가 됐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 ‘언약도’
스코틀랜드 개신교 신자들은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맞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 갔다. 이들은 1638년, 하나님과 스코틀랜드 교회의 혼인 서약을 의미하는 ‘국가 언약’을 체결한다.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언약도’라고 불렸다. 국가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언약도는 결국 찰스 2세의 핍박으로 2만여 명이 순교해야 했다. 교회 역사에서는 종교 박해로 수많은 언약도들이 죽은 이 시기를 ‘죽음의 시간(Killing time)’이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웅, 존 낙스는 “주여! 나에게 조국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남겼다.


프랑스의 개혁자들, ‘위그노’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은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렸다. 위그노는 프랑스 정부의 박해와 맞서야 했다. 1572년 8월 24일, 가톨릭 교도들은 성 바돌로매를 기념하는 가톨릭 축일을 기점으로 수천 명의 위그노를 대학살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1598년, 개신교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이 발표되면서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많은 위그노는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했다. 경제력을 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자 나라 경제는 악화됐고, 이것은 훗날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종교개혁, 그 이후
종교개혁의 정신은 잉글랜드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언약도, 프랑스의 위그노에게로 이어졌다. 오랜 세월 유럽의 종교였던 가톨릭은 종교개혁이라는 빙산에 부딪혔다. 유럽 교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어두웠던 중세는 저물고 근대 사회가 시작되고 있었다.Q



참고 자료: 허버트 조지 웰스, 『세계사 산책』
유재덕,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Vol.63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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