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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굴욕

2017년 10월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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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실화냐? #넘사벽1인자교황 #좋은승부였다


성, 기사 그리고 중세 시대
우뚝 솟은 성, 보좌에 앉은 영주,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중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게르만족에 이어 노르만족의 이동이 계속됐고, 이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백성은 불안했다. 백성은 땅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성을 짓고 기사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주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무장한 기사들을 거느리며 자연스럽게 중세의 지배 계급이 됐다. 국왕은 멀리 있었고, 영주는 가까이에 있었다. 백성은 토지를 나눠 주고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성의 절대 일인자인 영주를 주군으로 여기는 계약 관계가 시작된다. 이것이 중세의 특징인 봉건 제도이다.
영주와 기사 그리고 농민은 중세의 주요 계급이다. 그런데 여기에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특별한 계급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넘사벽 권력자 교황의 등장
중세 로마 기독교는 유럽 전체의 종교였다. 로마 기독교는 5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5개의 교구로 나뉘어 있었다.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알렉산더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거대 도시 안티오크, 제국의 오랜 수도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이 5대 교구 가운데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교구는 단연 로마 교구였다.
로마 교구의 총대주교는 다른 주교들과 구분하기 위해 ‘교황’이라 불렸다. 이후 ‘교황’은 로마 기독교 최고 지도자의 호칭이 됐다. 교황은 스스로를 ‘어부의 후예’라고 칭했다. 어부였던 제자 베드로를 잇는 겸손한 표현처럼 들리지만, 이는 사실 최초의 교황이자 예수님의 대리자로 여겼던 베드로의 후손임을 자청하는 것으로, 자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는 표현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서유럽 전체 토지 4분의 1을 소유했고, 로마 교황은 유럽 전체 교회를 움직이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는 둘이 될 수 없었다. 교회의 지도자 교황과 국가의 지도자 황제, 과연 누가 제1의 권력자인가. 길고도 오랜 싸움이 시작됐다.



교회의 영웅, 그레고리우스 교황
1073년, 교회의 영웅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으로 등극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하인리히 4세였다. 당시 영주들은 자신의 뜻대로 성직자들을 임명하고, 교회의 보호자로 행세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교회 지도자인 주교를 임명하는 권리를 누가 갖는가’의 문제, 즉 ‘서임권 갈등’은 민감한 문제였다. 이 갈등은 ‘누가 유럽의 최고 권력자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었다. 교회 측 대표 선수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국가 측 대표 선수인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가 시작된다.



서임권 갈등
“더 이상 영주는 성직자를 임명할 수 없다! 영주도 성직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평신도일 뿐이다!” 선제 공격을 시작한 것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교황은 성직자들이 세속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왕을 포함한 평신도들이 교회의 지도자인 주교 임명에 참여하는 일, 즉 그들의 서임권 행사를 금지시켰다. 황제 하인리히는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따라서 국가의 수장인 황제가 교회의 지도자를 임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반격에 나섰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립이었다.



전쟁의 시작
황제는 교황에게 도발적인 편지를 보냈다. ‘교황이 아닌 사이비 수사에게 편지하노라! 그대는 잔꾀와 뇌물로 권력을 쥐었으면서, 어찌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명예를 훼손하는가! 그대에게 명하노니, 당장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올지어다!’ 교황의 존재와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편지였다. 분노가 폭발한 교황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모든 교회를 향해 왕을 폐위시키는 ‘금령’을 보낸 것이다. ‘나는 황제 하인리히가 통치하는 것을 금한다. 그는 교만으로 교회를 짓밟으며 자신을 높였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든지 그를 왕으로 섬기는 것을 금하는 바이다!’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다.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나선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두 권력 사이의 사생 결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필립 샤프


하인리히 황제는 자신이 폐위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유럽 전체 사회와 교회가 교황의 판결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세는 교황에게 기울었다. 황제는 교황에게 사면을 간청해야만 했다. 황제로서 치욕적이지만,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카노사에서의 굴욕
1076년 겨울은 유럽 역사에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친 해였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한 사내가 두 살짜리 어린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초라한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산을 넘는 이 사내는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교황과의 대결에서 패한 황제는 사죄하기 위해 교황을 찾아가고 있었다.
카노사 성에 도착한 황제는 성의 주인인 마틸다와 클루니 수도원 원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황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교황의 반응은 싸늘했다. 1077년 1월 25일부터 사흘 동안, 관을 쓰지도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추위에 떨며 성문을 두드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제국의 젊은 황제가 백발의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렸다. 독일 제국의 수장이 로마 주교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교황은 황제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파문을 철회했다. 교황이 중세 유럽의 1인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그 후 200년간, 교황권의 전성기가 이어진다. 이제 교황은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더 위에 있는 초월적인 권력을 가졌다. 교회와 국가를 모두 다스리는 존재,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교회 권력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꿈꾼 것처럼 국가는 교회의 시녀가 됐다. 중세 로마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Q


참고 자료 :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5, 그레고리우스 7세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까지』
이강무,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Vol.59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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